제43회 '장애인의 날'을 맞은 20일, 장애인 당사자들은 "동정과 시혜로 포장된 장애인의 날이 아닌, 장애인 차별철폐의 날로 오늘을 기념하자"고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공투단) 연대 단체들은 이날 오전 서울 영등포구 63빌딩 컨벤션센터 앞에서 '장애인의 날을 거부하는 자들의 장애인 차별철폐의 날 기념식'을 열고 "4월 20일을 장애인의 날이 아닌 차별철폐의 날로 지정하고, 장애인을 차별하는 모든 것들과 맞서 싸우겠다"고 선언했다.
같은 시간 63빌딩 컨벤션센터에선 정부가 주관하는 제43회 장애인의 날 기념행사가 개최됐다. 정부는 "장애인에 대한 국민의 이해를 깊게 하고 장애인의 재활 의욕을 높이기 위해" 지난 1981년부터 매해 4월 20일을 장애인의 날로 지정, 해마다 "장애와 역경을 극복한 장애인"들을 선정·초청해 올해의 장애인상을 수상하는 등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반면 지난 2002년부터 '장애인의 날 반대운동'을 벌여온 공투단은 장애인의 △노동권 △이동권 △교육권 △주거권 △여성 권리 △복지 △참정권 등에 대한 실질적 보장을 20년간 요구해왔다. (관련기사 ☞ ‘장애인의 날’을 거부하는 장애인들이 있다) 정부주최 행사장 밖에 결집한 장애인들은 이날도 정부의 해당 행사 취지가 "기만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개인의 의사나 의지로 조절할 수 없는 특성인 장애를 "극복해야 할 역경"으로 취급하고 장애인들을 "재활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은 결국 대다수 장애인들을 "장애를 극복하지 못한 나약한 개인"으로 취급하는 '재활이데올로기'의 확대·재생산에 불과하다는 게 이들의 지적이다.
현장을 찾은 정기열 경기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은 "1년에 한 번 선심 쓰듯 기념되는 그런 기념일은 거부한다"라며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건 1년 내내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고 누릴 수 있는 권리보장"이라고 강조했다.
정부 기준대로 소위 '모범적인' 장애인을 선정해 정부포상을 지급하면서도, 정작 장애인권리예산 증액 의제 등 장애인에 대한 '실질적 권리보장'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정부의 양면적 태도를 꼬집은 셈이다. 지난해 12월 예결위를 통과한 교통약자 편의 증진을 위한 예산은 230억 원가량에 불과했다. 이는 전장연 등 장애인 단체들이 제시해온 요구안의 0.8% 수준이다.
기념식에 연대 방문한 오준호 기본소득당 공동대표는 "(예산안) 이건 미진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교통약자 편의 증진에 대한) 계획조차 없는 것"이라며 "추경을 해서라도 이동약자 예산을 즉각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장애는 본인의 책임이 아닌데 그로인한 곤란함, 어려움, 차별 등을 개인이 감당하도록 하는 건 민주주의 사회라 할 수 없다"라며 "법인세, 종부세 등은 깎으면서 장애예산은 확보 못한다는 건 변명이고 회피"라고 지적했다.
오 대표와 강 의원 이외에도 정의당 심상정, 강은미, 이은주, 장혜영 의원, 민주당 우원식,남이순, 유기홍, 강훈식, 최혜영 의원 등이 영상 편지를 보내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에 대한 지지와 연대 의사를 표명했다.
"장애인에게 '감동 스토리' 강요는 그만"
이날 자리엔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가족, 난치성 질환 환자, 대학 인권 동아리 회원 등 각계 당사자 시민들도 참여했다.
난치성 질환 환자로서 "시혜와 동정의 날을 거부하고자" 현장을 찾았다는 시민 노예준 씨는 "사회가 장애인에게 듣고 싶어 하는 감동적 극복 스토리는 장애가 단지 개인의 의지에 달려있는 것처럼 말한다"라며 "당신들이 극복하라는 건 우리의 '몸'이지만, 정작 우리 앞을 막아서는 건 수많은 사회적 차별들이다. 그 문턱들부터 봐 달라"고 말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故) 최유진 씨의 아버지 최정주 씨는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혹은 (참사) 유가족이라는 이유로 차별 받고 손가락질 받고 보살핌에서 소외될 이유가 없다"라며 "국가가 모든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장애인들을, 그리고 유가족들을, 모든 국민들을 보호할 의무를 다 하길 촉구한다"고 밝혔다.
집회 참여자들은 윤석열 대통령, 오세훈 서울시장 등 정부여당 관계자들이 강조하는 '공정과 상식'이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통용되는 개념인가" 묻기도 했다.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은 "오세훈 시장은 지난 18일 장애인의 날 행사에서 장애를 매우 불편한 존재로 이야기하고, 불편하기 때문에 장애를 극복해야 한다고 했다"라면서 "(그러나)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평생을 장애인으로 산 나는 장애를 극복하고 싶지 않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비장애인 친구들은 계단을 쉽게 올라갈 수 있었고 이동을 간편하게 할 수 있었다. 학교에 마음대로 다녔고 자기가 어떤 직장을 선택할 것인지를 얘기하곤 했다. 반면 나는 계단을 보면 내가 갈 수 없는 곳이라 여겼고, (이동이 어려우니) 학교도 갈 수 없었다. 직장을 선택할 수도 없었다"라며 "그런데 오 시장은 (장애인에게) 장애를 극복하라 하시나"라고 오 시장의 발언을 꼬집었다.
그는 이날 오전 페이스북 게시물을 통해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다름없는 공정한 기회를 갖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공언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해서도 "(대통령이 말하는) 공정을 위해서 우리는 22년을 투쟁했다. 지하철 승강장에서 366일 동안 선전전을 하고 있다. 그동안 윤 정부는 공정을 위해 어떤 일을 했나"라고 되묻기도 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업로드한 자신의 게시물에서 "(정부는) 올해 3월 '23~'27 장애인정책종합계획'을 발표했다"라며 장애인복지서비스에 대한 정부의 공로를 강조했다. 그러나 대통령실, 기재부 등 정부 관계부처들은 지금까지 전장연 등 장애인 당사자 측이 요구해온 '권리예산의 확보' 문제에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정부가 국무총리 주재의 장애인 정책 통합계획을 발표하고 △약자복지 △사회서비스고도화 △글로벌스탠다드(유엔 권리협약)라는 세 가지 정책기준을 밝힌 지난 3월 9일에도 전장연 측은 "이 역시 권리보장법 제정을 통한 예산배정이 없다면 말뿐인 약속"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4월 20일 기점으로 지하철 탑승 시위 재개여부 결정할 것"
전장연은 예산결정 주체인 기재부와 윤 대통령, 한덕수 국무총리 등 정부의 책임을 강조하며 대통령집무실 인근 서울지하철 4호선 삼각지역에서 지하철 선전전 및 탑승행동 등을 벌여왔지만 지난달 24일 "국회의원모임 약자의 눈을 통해 한덕수 국무총리와의 면담이 진행될 것이라 확인했다"라며 이날(20일)까지 지하철 탑승행동을 일시중단한 상태다.
전장연 측은 약속 기한인 이날 성명을 발표하고 "이제 국무총리는 면담과 장애인귄리예산 중 이동권예산 분야 특별교통수단에 대하여 응답하라"라며 "장애인특별교통수단에 대한 예산 만이라도 약속한다면 전장연은 나머지 예산과 관련하여 출근길에 지하철 타지않고 승강장에서 기다릴 것이다. 만약 응답이 없다면, 약속할 때까지 출근길 지하철을 탈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기념식을 찾은 박경석 전장연 공동대표는 "전장연은 애초 요구한 장애인권리예산 증액을 이동권 예산으로 범위를 줄여 다시 요구했고, 이번엔 이를 다시 '특별교통수단 예산 증액'으로 한 번 더 범위를 줄였다"라며 "그러나 정부는 예산 증액 의제는 물론 한덕수 총리와의 면담 진행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아무런 답을 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오늘 하루가 조금 남았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오늘이 가기 전에 답을 달라"라며 "답을 하지 않는다면 저희는 내일부터 적극적으로 출근길에 지하철을 타겠다"라고 강조했다.
이날 오전 8시 서울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서부터 시작된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은 63빌딩 앞에서 열린 기념식을 거쳐 삼각지역 야외무대, 용산 대통령실 앞 등 서울 도심 곳곳에서 21일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공투단 측은 장애인 이동권 보장, 권리예산 증액, 평생교육권 보장, 탈시설 등 주거권 보장, 치료·접근권 확대 등을 각각 행사에서 촉구하고 있다.